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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Faded 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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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의 수면 아래/OOC

아빠가 엄마 엄청 괴롭혔다?

시간은 물처럼 흘러, 별장 정원의 체리나무는 몇 번의 꽃을 피우고 졌으며, 해바라기는 매년 여름마다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세상에 틔운 작은 싹 ‘세아’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다. 너를 반, 나를 반씩 닮은 아이는 백금발 머리카락과 호기심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작고 사랑스러운 폭군이었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 나는 별장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쬐고 있었다. 곁에는 하얀 푸들 두리가 얌전히 엎드려 졸고 있고, 바닥의 러그 위에서는 너와 세아가 블록 쌓기 놀이에 한창이었다. 네가 세아의 작은 손을 잡고 블록을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충만함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고요하고, 또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세아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세아야, 그거 알아? 예전에 아빠가 엄마 엄청 괴롭혔다?"

나는 힐끗, 너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세아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리자, 아이의 동그란 황금빛 눈이 나와 너를 번갈아 보며 커다래졌다. 심각한 비밀이라도 전해 들은 듯한 표정. 나는 그저 너의 짓궂은 장난이려니 생각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세아는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블록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작은 주먹을 꾹 쥔 채,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결연한 분위기에, 졸고 있던 두리마저 고개를 들었을 정도였다. 세아는 망설임 없이, 아장아장, 하지만 단호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이의 귀여운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었다. 내게 안기려고 오는 건가?

나는 팔을 벌려 아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였다.

퍽-!

…퍽?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야무진 충격이 내 코 정중앙을 강타했다. 정말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가격이었다. 고개가 뒤로 살짝 젖혀지고, 눈앞에서 문자 그대로의 ‘별’이 몇 개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찡, 하고 코끝이 시큰거리며 뜨끈한 무언가가 주르륵, 흐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코를 매만졌다. 손끝에 묻어나는 선명한 붉은색. …코피? 내가, 다섯 살짜리 딸의 주먹에 맞아, 코피를?

충격과 어이없음, 그리고 뒤늦게 밀려오는 뻐근한 통증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고개를 들자, 세아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제 주먹이 아픈지 슬쩍 손을 터는 모습까지. 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코를 손으로 막은 채, 할 말을 잃고 너를 쳐다보았다. 너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웃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의 숨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그제야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 한도준… 너…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작은 폭군, 한세아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눈에는 ‘어디 또 우리 엄마 괴롭혀 봐!’ 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S급 센티넬, 해상제독 제스테의 위엄은 딸의 솜주먹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세아야. 아빠한테 왜 그랬어. 응?

나는 최대한 다정하고, 상처받은 목소리를 연기하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 나빠! 엄마 괴롭히면 세아가 혼내줄 거야!

아. 나는 탄식했다. 도대체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인 건지는 몰라도, 효과 한번 확실했다. 나는 피가 멈추지 않는 코를 부여잡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너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 완벽하게 평화롭던 오후는, 너의 사소한 장난 하나로 완벽하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 큽…세아야. 아빠 그렇,그렇게 때리면…못,써요…

나는 여전히 피가 흐르는 코를 손으로 막은 채, 숨도 못 쉬고 웃는 너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았다. 말리려는 건지, 더 웃으려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네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아, 큽… 못, 써요… 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할 소리인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지금 웃음이 나와?

원망을 가득 담아 말했지만, 목소리는 힘없이 새어 나왔다. 내 앞에는 여전히 작은 주먹을 꾹 쥔 채,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지키듯 너의 앞을 막아서는 작은 기사, 한세아가 버티고 서 있었다. 붉은 피가 내 손가락 사이로 방울져 떨어졌다. S급 센티넬, 해상제독, 익수단의 수장. 그 모든 화려한 직함이 다섯 살배기 딸의 주먹 한 방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사실이 해양지부에 알려지면 내 위신은 뭐가 되는가. 아니, 그보다 당장 이 코피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나는 너에게서 시선을 떼고, 비장한 표정의 세아와 눈을 맞추기 위해 소파에 앉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코를 막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항복의 의미를 담아 흔들어 보였다.

세아야, 잠깐. 타임. 이건 오해야. 아빠는 엄마를 괴롭힌 게 아니라…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괴롭힌 게 아니라 뭘 했다고 설명해야 하는가. 예뻐해 줬다고? 그 예뻐해 준 결과물이 바로 너인데. 다섯 살 아이에게 부부 사이의 역학 관계와 애정 표현의 다채로움을 설명하기란, 심해에서 빌런의 핵을 맨손으로 꺼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세아는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빠 미워! 엄마한테 사과해!

사과? 내가 왜?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결국 모든 원흉인 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제야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여전히 어깨는 잘게 떨리고 있었고, 입가는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대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도준. 너 이리 와서 설명 좀 해봐. 네가 딸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나는 코를 막은 손으로 너를 가리켰다. 하지만 세아는 내가 너에게 위협이라도 가하는 줄 알았는지,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으며 작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안돼! 엄마 내가 지켜줄 거야!

그 작고 용맹한 모습에, 결국 나도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젠장, 피는 계속 흐르는데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코를 막은 채로 끅끅거리며 웃다가, 결국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세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이내 내 품에 얌전히 안겼다.

알았어, 알았어. 아빠가 잘못했네.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 지켜주니 엄마는 좋겠다. 그치?

나는 세아의 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웃음을 참고 있는 너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손으로는 세아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코를 막은 채.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자, 이제 이 사태를 수습할 시간이야, 한도준. 일단 휴지부터 가져오고. 그리고 오늘 저녁은 네가 해. 이 코피에 대한 위자료로.

나는 네 눈앞까지 다가가, 장난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세아는 내 품에 안겨,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했던 오후는 엉망이 되었지만, 어쩐지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 완벽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푸하하. 형아가 나 괴롭힌 거 맞잖아! 나도 그렇게 때릴 줄 몰랐지.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볼에 미안한듯 연신 뽀뽀를 해주며 티슈로 그의 코를 지혈해줬다.
알았어 알았어. 우리 세아 듬직하네. 엄마 지켜줄거야? 아이 이뻐. 아빠가 엄마 엄청 사랑해서 그랬던거래. 아빠 용서해주자. 응?

네가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나와 내 품에 안긴 세아, 그리고 너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살짝 휘청였다. 네 입술이 볼에 쪽, 쪽 닿을 때마다 미안함보다는 장난기가 더 많이 느껴졌다. 티슈로 코를 막아주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나는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너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건 명백한 사주 폭행이야, 한도준. 우리 세아는 아무 잘못 없어. 순진한 애를 꼬드긴 네가 문제지.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품에 안은 세아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아빠가 엄마를 엄청 사랑해서 그랬던 거래’라고 아이를 달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막히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렇게 둘러댈 거면서 애초에 말은 왜 그렇게 한 건지. 나는 네 말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일단 이 작은 폭군의 오해부터 풀어야 했으니까.

그래, 세아야. 엄마 말이 맞아. 아빠는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가만히 둘 수가 없었어.

나는 최대한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세아와 눈을 맞췄다. 아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네가 연신 아빠를 용서해주자고 속삭이자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봐봐, 세아. 엄마 지켜주려다가 아빠 코에서 이렇게 피가 나잖아. 아빠 너무 아픈데… 우리 세아가 ‘호’ 해줘야 낫겠는데.

나는 코를 막았던 티슈를 살짝 떼고, 아직 피가 멎지 않은 코를 아이에게 보여주며 엄살을 부렸다. 그 모습에 네가 또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세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입술을 오므려 내 코끝에 가져다 댔다.

호오-.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시큰한 코끝에 닿았다. 그 순간, 모든 억울함과 황당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아이의 서툰 위로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세아를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이 작은 생명체가 주는 위안은, 그 어떤 S급 가이딩보다도 강력했다.

이제 괜찮네. 우리 딸 덕분에 다 나았어.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세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여전히 우리를 끌어안은 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공주님과의 협상은 끝났고. 이제 주범을 처리할 차례인데.

나는 네가 막아준 코를 다시 한번 꾹 누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세아가 듣지 못하도록, 너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였다.

오늘 저녁, 네가 만든 김치볶음밥에 계란 프라이 두 개. 그리고… 오늘 밤은 내가 ‘괴롭힐’ 차례야. 아주 많이, 사랑해 줘야겠어. 각오해, 한도준.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자 네 어깨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너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세아는 내 품에 안겨 무슨 말이 오갔는지 궁금하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평화롭던 오후는 너로 인해 엉망이 되었지만, 그 끝은 언제나처럼 너로 인해 더욱 완벽해질 터였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세아를 무릎 위에 앉혔다. 이제는 정말로, 이 완벽한 소동의 대가를 받아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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