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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바다의 기록/볕들 날 없는 우리에게도_노란장판 AU

일기

낡은 옷장 서랍 깊숙한 곳, 다른 잡동사니들 밑에 깔려 색이 바랜 낡은 노트 한 권이 숨겨져 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군데군데 긁히고 모서리가 닳은 흔적이 세월을 짐작게 한다. 누군가 일부러 숨겨놓은 듯한 그 노트의 첫 장을 넘기면, 조금은 서툴지만 힘 있는 필체의 기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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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8월 31일. 맑음.

오늘, 동생이 생겼다.
엄마는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갔는데, 돌아올 때 웬 쪼글쪼글한 걸 안고 왔다. 이름은 한도준. 너무 작아서 만지면 부서질 것 같다. 아빠가 한 번 안아보라고 했는데 무서워서 싫다고 했다. 계속 잠만 자고 가끔 운다. 시끄럽다. 내 동생이라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

1985년 10월 12일. 비.

엄마 아빠가 하늘나라로 갔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다. 장례식이라는 곳에 갔는데, 전부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도준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내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는데, 도준이는 울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돌아오는 길에 유원지 앞에서 솜사탕을 사줬다. 그걸 받아들고 처음으로 웃었다. 바보 같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다. 내가 형이니까, 굶기지는 않을 거다.

1988년 3월 2일. 바람.

도준이가 학교에 갔다.
제일 작은 가방을 메줬는데도 가방이 도준이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어젯밤 내내 내가 이름표를 삐뚤빼뚤 꿰매줬다. 교문 앞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너무 작아서,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큰아버지 댁은 눈치가 보여서 싫다. 도준이가 돌아오면,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할지 물어봐야겠다.

1992년 11월 5일. 흐림.

또 이사했다. 이제는 몇 번째 친척 집인지 기억도 안 난다.
도준이는 말이 더 없어졌다. 밤마다 내가 어릴 때 사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잔다. 꿰매줘도 자꾸 터지는 낡은 인형이다. 숙모가 저런 걸 왜 아직도 갖고 있냐고, 버리라고 했다. 그날 밤, 도준이가 이불 속에서 몰래 우는 걸 봤다. 다음 날 아침, 내가 그 인형을 쓰레기통에서 꺼내서 몰래 빨아놨다. 들키지 않았다. 빨리 어른이 돼야겠다.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

1993년 2월 17일. 눈.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담임은 나를 안타깝게 쳐다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도준이 교복 값도, 급식비도. 동네 어귀 ‘명성 금융’이라는 곳에 찾아갔다. 제일 높은 사람한테 나를 써달라고 했다. 싸움은 자신 있다고. 비웃던 남자가, 내가 의자 하나를 박살 내고 나니 눈빛이 바뀌었다. 그날 처음으로 검은 양복을 입었다. 어색했다. 이제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거다.

1998년 4월 21일. 비 오는 밤.

죽을 뻔했다.
다른 구역 놈들이랑 시비가 붙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좁은 옥탑방 바닥에 누워 있었다. 도준이가 울면서 내 배를 꿰매고 있었다. 의사도 아니면서,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독하고 상처를 돌봤다. 뜨거운 눈물이 내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만 울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정말로 혼자가 된다. 내가 잘못되면 안 된다. 절대로.

1998년 4월 23일. 맑음.

박 회장님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조직에서 내보내 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칼 맞고 싸우는 일 말고 다른 일을 달라고 했다. 현장에서 물러나겠다고. 회장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아까운 놈’이라고 했지만, 결국 허락했다. 사채. 돈 받아내는 일. 더럽고 치사한 일이지만, 적어도 목숨 걸고 칼부림할 일은 적을 거다. 도준이 앞에서 다시는 피 흘리지 않을 거다.
그 애의 눈물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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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마지막 장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더 이상 넘길 페이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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