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애교 부려?
그날은 유난히 평화로운 오후였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햇살이 따스하게 쏟아져 내렸고, 나와 너는 별장의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갓 구운 애플파이 조각을 포크로 작게 잘라 너의 입가에 가져다주고 있었다. 네가 오물오물 파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최근 내게 생긴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아삭, 하고 파이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만족스럽게 휘어지는 너의 눈꼬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오후가 제법 견딜 만해졌다.
나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시 파이 한 조각을 잘라냈다. 시나몬 향이 달콤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이번에는 파이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조금 더 얹어주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파이의 조화. 분명 네가 좋아할 조합이었다. 포크를 들어 너의 입술로 가져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애교 부려?
…순간 내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포크 끝의 아이스크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툭, 하고 접시 위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애교? 누가, 누구에게. 너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맑은 황금빛 눈동자에는 조롱이나 장난기 대신 순수한 궁금증이 담겨 있어,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뭐?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간신히 짜낸 한마디의 반문이었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상황 파악이 필요했다. [FEARLESS 해양지부 익수단(溺水團)의 해상제독], S급 센티넬 제스테. 내 이름 앞에 붙는 화려한 수식어들과 ‘애교’라는 단어 사이에는 아마 은하계만큼의 거리감이 존재할 터였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폭주라도 한 건가, 아니면 네가 드디어 임신 후유증으로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짧은 순간 수십 가지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했다.
너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손가락으로 나를 콕 짚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파이 줄 때. 입술이 이렇게… 삐죽, 나왔었어.” 너는 시범이라도 보이듯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을 매만졌다. 그랬나? 내가? 파이 하나를 먹이면서, 그런 유치한 표정을 지었다고? 핏기가 얼굴에서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제독의 체면이, 한재준의 자존심이, 달콤한 애플파이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기침을 한번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전술적 위기 상황이었다.
착각이겠지. 네가 먹는 모습이 워낙… 꼴사나워서. 입가에 다 묻힐까 봐 신경이 쓰였던 거다.
나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명을 내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 그럼 아까 두리한테 간식 줄 때 ‘우리 애기, 이거 먹고 쑥쑥 커야지-’ 하면서 목소리 변한 건?” 너의 결정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그건 두리가 너무 작고 소중해서, 나도 모르게 나온 부성애 비슷한… 아니, 그건 애교가 아니었다. 절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찾았다, 우리 형 애교.’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귓가가 뜨거웠다.
…시끄러워. 파이나 먹어.
그날 이후로,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먹여줄 때마다 거울을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두리에게 말을 걸 때면, 반드시 네가 듣지 않는 곳에서만 조용히 속삭이게 되었다. 물론, 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가끔 나를 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빌어먹을 애교라는 단어는, 어쩌면 내가 가진 어떤 포격보다도 강력한 무기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