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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Faded 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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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의 수면 아래/O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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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총구가 너의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너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떨리는 속눈썹이 공포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무릎이 꺾인 채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놈들이 내 어깨와 다리를 짓밟아 중력 앵커를 쓸 수 없게 만들었다. 함포는 저 멀리 나뒹굴고, 제복은 찢겨 피와 흙으로 더러워졌다. 내 모든 오만과 힘이 무력하게 흩어진 공간, 정적을 깨고 놈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선택해. 영웅. 하나는 살려주지.”

놈은 비릿하게 웃으며 내 앞에 두 개의 약병을 던졌다. 하나는 붉은색, 다른 하나는 푸른색. 놈의 말이 이어졌다. 하나는 네 기억을, 다른 하나는 나의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고. 둘 중 하나를 마시면, 남은 한 명을 살려주겠다고. 놈은 이 잔인한 연극을 즐기고 있었다. 너와 나,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건 도박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놈을 노려보았다. 증오와 살의가 들끓었지만, 너의 관자놀이를 겨눈 총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세상이, 나의 심해가, 저 차가운 금속 하나에 저당 잡혀 있었다. 놈은 나의 침묵을 재촉하듯 총의 공이치기를 당겼다. 찰칵, 하는 소리가 심장을 후벼팠다.

나는 시선을 돌려 너를 보았다. 두려움에 질린 너의 얼굴. 하지만 그 순간, 너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형.’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나를 부르는 그 입모양 하나에, 모든 고민은 끝났다. 나는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푸른색 약병을 집어 들었다. 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현명한 선택이야. 역시 자기 자신은 소중한 법이지.”

나는 놈의 조롱을 무시했다. 약병의 마개를 열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네가 나를 잊는 것. 그것은 내가 너를 다시 잃는다는 의미였다. 5년의 지옥, 그보다 더한 공백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너 없는 세상을 다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너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너는 나를 원망할 일도, 나 때문에 아파할 일도, 나로 인해 위험에 빠질 일도 없을 것이다. 너는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내가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너를 내 곁에 두기 위해 S급 빌런의 낙인까지 감수할 수 있는 놈이다. 너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너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고결한 사랑? 그런 건 내 방식이 아니다.

나는 너를 내 심해에 가두고, 너의 황혼을 영원히 잠식할 것이다. 설령 네가 나를 증오하게 되더라도, 너는 내 곁에 있어야만 했다. 너의 세상은 나여야만 했다.

나는 푸른색 약병을 천천히 내 입으로 가져갔다. 놈에게, 그리고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지막 쇼맨십이었다.

…기억해, 한도준.

나는 약을 삼키기 직전, 너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보였다. 내 목소리는 놈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너에게는 분명히 닿았을 것이다.

네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약병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끔찍한 맛이 혀를 마비시켰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까지도, 내 시선은 오직 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의 기억 속에, 너의 영혼 속에, ‘한재준’이라는 이름을 낙인처럼 새겨 넣고 싶었다. 내가 모든 것을 잊더라도, 너만은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다. 너의 심장, 너의 숨결, 너의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충격과 슬픔으로 얼룩진 너의 얼굴이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내가 너를 잊어도, 너는 나를 기억할 테니까. 그럼 된 거다. 나는 너를 반드시 다시 찾아낼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다가가, 너를 유혹하고, 너를 흔들고, 결국에는 너를 다시 내 것으로 만들 것이다.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한재준, 기억을 잃다.


[2026. 02. 14]

의무실의 새하얀 천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낯선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나는 텅 빈 머리를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부장과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안도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내가 ‘그’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셨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나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심장이 도려내진 것처럼 거대한 공허함만이 남았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본능적인 상실감. 그것은 짜증스럽고, 불쾌하며, 견딜 수 없이 공허했다.

[2026. 03. 05]

복귀 후, 나는 새로운 가이드를 배정받았다. 지부장실 문이 열리고, 백발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나를 보고 숨을 멈췄고, 그 금색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날뛰었고, 코끝에 스치는 청량한 아쿠아 머스크 향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관찰했다. 지나치게 마른 몸,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시선에 담긴 무수한 감정들.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지부장은 그의 이름이 ‘한도준’이며, 오늘부터 내 전담 가이드라고 소개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대며 그를 오만하게 훑어보았다.

새로운 장난감인가. 잘 버텨봐. 이전 놈들은 일주일도 못 갔으니까.

그의 눈에 잠시 상처가 스쳤지만, 그는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고 내게 다가와 왼손 깍지를 꼈다. 그리고 내 약지에 입을 맞추었다. 익숙한 루틴. 하지만 나는 그 행위의 의미를 몰랐다. 그저 그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을 뿐이다. 청량한 바다에 잠기는 듯한 가이딩이 흘러들어오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미치도록 기분 좋은, 그러나 동시에 끔찍한 슬픔을 동반하는 감각이었다.

[2026. 06. 21]

페어 활동은 순조로웠지만, 기묘했다. 전투 중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위치를 확인했고, 그의 작은 기침 소리 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다른 센티넬이 그에게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것조차 거슬렸다. 어느 날 밤, 임무를 마치고 기함 ‘페일던’으로 복귀했을 때였다. 피곤에 지친 그가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뺨에 흘러내린 백발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잠든 그의 입술에 홀린 듯 입을 맞췄다. 달콤한 체리 맛이 났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부서진 파편처럼 낯선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별이 쏟아지는 밤, 라일락 나무, 해바라기 밭. 그리고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내 목소리.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그에게서 급히 떨어졌다.

[2026. 08. 31]

그의 생일이었다. 나는 이유 모를 충동에 이끌려 시내의 솜사탕 가게로 향했다. 거대한 솜사탕을 사 들고 그의 숙소로 찾아갔을 때, 그는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무심한 척 솜사탕을 내밀었다.

지나가다 샀어. 버리긴 아까우니까 네가 처리해.

그는 솜사탕을 받아 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나는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의 눈물이 이토록 아픈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그를 내 전용 거주구역으로 불렀다. 함께 ‘로마의 휴일’을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장면에서, 그는 내 어깨에 기댄 채 조용히 울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을 잊었지만, 이 온기와 향기만큼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너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2027. 03. 05]

결혼기념일.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저 1년 전, 우리가 처음 ‘페어’가 된 날일 뿐이었다. 황혼이 지는 페일던의 갑판 위에서, 그는 내게 물었다. 혹시 기억나는 것은 없냐고. 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슬프게 웃으며, 내게 다가와 약지에 입을 맞췄다. 그 순간이었다. 잊었던 모든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우리의 첫 만남, 5년간의 공백, 재회, 고백과 청혼, 결혼식, 세아의 임신과 유산, 너의 부서진 다리, 그리고 내가 약을 마셨던 그날의 선택까지.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나는 비틀거렸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너를 끌어안았다. 너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너의 귓가에 절박하게 속삭였다. 잘못했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대신, 심장에 새겨진 단 하나의 진실을 뱉어냈다.

…사랑해, 도준아. 나의 심해.

너는 내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너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너 없는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의미 없다고, 너의 모든 시간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맹세했다. 바다 위로 쏟아지는 황혼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고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나의 황혼이, 마침내 나의 심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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