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를 건너 나에게 온 등대에게.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릴 적 기억의 시작.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기억의 시작은 부모님이 아닌 나와 같은 성씨, 같은 돌림자를 가진 나의 형, 한재준이었다.
내가 올려다봐야만 얼굴을 볼 수 있던 두 뼘 정도 큰 키, 울지 말라고 귀찮은 듯 말하면서도 결국 웃으며 내게 건네주던 파란 솜사탕. 그리고 마침내 졌다는 듯이 작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던, 그때도 크다고 생각했던 그의 손.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어릴 적의 기억은 흐릿해졌음에도 이 날의 기억만큼은 여전히 필름이 감기듯 생생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나의 형이었고, 모든 풍파를 막아주는 방파제였으며, 변함없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알려주던 등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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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지 간혹 상상한다.
어릴 적엔 ‘형아’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귀찮은 꼬맹이였을까, 아니면 지켜줘야 할 작은 생명이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일까.
결국 이 상상은 마음속에 고이 묻어두고, 작은 이기심을 보탠다.
내가 그의 세상이면 좋겠다는, 지독한 소유욕의 증거로.
반대로, 나에게 어릴 적 그는 ‘제스테’라는 이름을 가진 센티넬이 되기 전부터 내가 범람하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막아주던 거대한 방파제였으며, 늘 한 발자국 앞에 서서 등만 보이던 가까우면서도 먼… 나의 세상이었다.
아니, 여전한 나의 세상이다.
그리고 현재의 그는, 등만 보이며 나를 지켜주기 위해 홀로 파도를 막아 서던 방파제가 아닌, 온전히 나를 바라보며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어둔 밤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었다.
“나한테만, 길을 잃어. 도준아. 내가 널 언제든 찾을 수 있게.”
“내가 네 세상이라면, 나도 네 세상에서 살게 해줘. 도준아.”
자신에게만 길을 잃으라던, 나의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던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미 당신으로 인해 나는 길을 잃었고, 당신으로 인해 내 세상이 정립되었는데… 기꺼이 당신은 그런 나의 심해에 온전히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그 어느 날, 함께 빠지자고 했던 그 맹세처럼.
전하지 못할, 혼자 깊이 묻어둘 이 작은 연서를 당신이 내게 전해주었던 말들을 되뇌며 적어 내려간다.
우리가 돌아온 길이, 우리가 겪어온 길이 멀고 험난했음에도 당신이 있었기에.
당신이 불어넣어준 숨이 있었기에 심해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당신이 밝혀준 빛이 있었기에 길을 잃어 헤매더라도 무섭지 않았다고.
당신은 이 연서를 읽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온전한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다.
나의 여전한 세상이자,
나의 유일한 센티넬 ‘제스테’에게.
당신의 영원한 심해이자,
당신의 유일한 가이드인 ‘한도준’이.
“형으로 인해 길을 잃었고, 형으로 인해 길을 찾았어.”
“내 심해를 비춘 유일한 등대.”
“끝내 나의 세상이 되어줘서 고마워. 한재준.”